돌로미티 치마 그란데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고 나니 알프스가, 돌로미티가 달리 보인다. 누가 그랬나. 알프스=소녀 하이디라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돌로미티가 1차 대전의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2024년 7월 30일 다시 결전의 날이 왔다.
오늘은 반드시 치마 그란데 정상을 올라야 한다. 산장 밖으로 나오니 어제와 다르게 새벽 공기가 달라졌다. 코끝이 차고 바람도 꽤 분다. 이곳에 머무는 며칠 중 가장 추운 날이다. 바람이 차가워서 재빨리 고어 자켓을 꺼내 입고 장갑도 낀다.
해발 2,330m의 새벽, 고어텍스가 필요한 시간이다.
몇몇 등반팀들이 산장을 나서고 우리팀도 서둘러 출발했다. 오늘은 로프가 없어서 배낭이 가볍다. 이틀 전 등반 때 하강을 마치고 등반 로프를 치마 그란데 서벽과 치마 오베스트 사이 바위 아래에 디포(depot)해 놓고 내려왔다. 등반지까지 어프로치 시간도 줄이고 배낭 무게도 가볍게 할 요량이었는데 간밤에 로프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지 뭔가. 꿈은 반대라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대장님. 저 로프가 사라지는 꿈을 꿨어요. 없으면 어떡하죠?” “없으면 등반 못하지. 내려가서 아침 먹고 한 숨 자고 담페초 장비점에 가서 로프 사와야지. 뭘 걱정해. 그것보다 북벽으로 내려가야 하는 곳에 얼음이 없어야 할 텐데 말이야. ”
트리치메는 오늘도 한결같이 웅장하다. 처음 트리치메를 봤을 때는 바위 규모가 너무 거대하고 거친 위압감에 똑바로 보기가 힘들더니 새벽 산책 마다 보고 트레킹 하면서 보고 또 한 번 등반을 했더니 거친 근육질의 바위가 제법 친근 해졌다. (물론 낙석은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아침 햇살을 받는 트리치메 암벽
적응 안되는 트리치메 어프로치
오늘도 가파른 돌길을 향해 올라간다. 한 숨 돌리려 뒤를 돌아보니 새하얀 운해 위로 새벽 여명이 눈과 발을 잡아 놓는다. 시간이 딱 지금에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등반이고 뭐고 황금빛 들판에 누워 이 시간을, 이 공간을 오롯이 느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안하고 멍 때리고 누워 있으면 딱 좋겠네.” “오늘 신나게 등반하고 내일 멍도 때리고 소풍도 가고 다하자. 내일은 쉬면서 알프스 하이디 소녀 아니 이젠 할머니가 되었나? 암튼 그 소녀 할매처럼 알프스를 누비고 산장 투어도 하면서 와인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소풍 가자. 오케이?” ( 소풍 말고요…저는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멍 때리고 싶다고요 대장니임~)